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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부동의’에 동의하는지 질문하다

장애인 성폭력 상담소에서 활동하다 보면 장애여성의 경우 주변인에 의해 성폭력 피해가 인지되어 상담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의 절대다수는 지적장애나 자폐성 장애 등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피해자들의 사건을 지원하다 보면 몇 가지 반복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장애인 성폭력 상담소에서 활동하다 보면 장애여성의 경우 주변인에 의해 성폭력 피해가 인지되어 상담 의뢰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의 절대다수는 지적장애나 자폐성 장애 등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피해자들의 사건을 지원하다 보면 몇 가지 반복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성폭력? ‘사귀는 사이’인데…

첫 번째 상황은, 피해자들이 가해자와의 관계를 연애 관계로 인지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주변인에 의해 성폭력으로 신고되어 상담소에 방문하게 된다. 하지만 피해자와 상담하다 보면 자신은 가해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상호 합의된 성관계와 성폭력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성폭력을 ‘때리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는 ‘자신을 때린 적도 없고 자신에게 잘해주는 좋은 사람’으로 가해자를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가해자와는 채팅으로 몇 번 대화를 주고받은 것이 전부인 상황에서 처음 만난 날 바로 애인이 되고, ‘사귀는 사이에서는 해야 하는 일’이라며 일방적으로 성적 행위를 강요받을 때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남자친구가 화를 낼까 봐’ 혹은 ‘남자친구가 계속 조르고 안 해주면 삐쳐서’ 자신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해자가 원하는 행위를 참았던 경험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연애는 극장 가서 영화도 보고 놀이공원 가는 건데, 남자친구는 만나면 매번 성행위만을 요구해서 힘들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가해자를 남자친구로 인식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폭력’으로 진술하기는 어렵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기회나 관계가 제한적인 장애여성들은 ‘연애 관계 상대’, 혹은 연애 관계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상대방을 인식하는 상황에서 ‘가해자의 일방적 성적 행위를 거절하면 이 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이를 참기도 한다. 그런 경우, 이를 진정한 의미의 ‘동의’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부당하거나 착취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신체적, 성적 침해에 대해 스스로 참기를 ‘결정’한 것이니 이것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장애여성이 평소 다양한 대인관계를 통해 상호 존중하는 관계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연애 관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연인 사이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면, 혹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거나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중단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즉,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할 다른 것이 있고, 그 다른 것을 선택해도 나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학교에서, 더 나아가 사회로부터 동등한 인권을 가진 동료 시민으로서 존중받아본 경험보다는 무시와 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온 장애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보면, 가해자와의 관계를 특별히 착취적 관계라고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가해자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취약한 피해자일수록, 가해자의 요구를 참고 들어줌으로써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위계가 명확한 관계에서 위와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해서 내린 ‘결정’을 온전히 피해자의 자발성에 기인한 ‘동의’로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성폭력! ‘싫다’고 했는데...

두 번째 상황은, 피해자가 분명히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가해자가 이를 무시하거나, 가해자의 가벼운 위협에 피해자가 쉽게 저항을 포기한 경우이다. 피해자들은 피해 상황에 대해 ‘나는 싫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가만있으라고 하면서 했다’, ‘손으로 밀었는데 ○○○는 힘이 세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방식으로 피해자의 저항이 쉽게 제압당하는 상황을 진술한다. 또는 피해 당시 제대로 된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거나 저항을 쉽게 포기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를 ‘가해자의 얼굴이 무섭게 생겨서’라거나, ‘때릴 거 같아서’, 혹은 ‘가족에게 말한다고 해서 무서워서’라고 한다. 하지만 직접적인 폭행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런 사건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어떠한 말이나 행동이 왜 자신에게 위협이 되고 그로 인해 저항할 수 없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러한 폭력 상황을 가족에게 말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불리한 상황인데 그것이 왜 피해 장애여성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지는 그 여성이 일상적으로 가족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맥락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장애여성들은 피해 상황에서 가해자의 일방적인 성적 행위에 대해 나름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무시되거나, 저항을 포기하고 가만히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장애를 가진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위치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장애여성을 ‘취약계층’, ‘요보호(보호가 필요한) 대상자’로 분류하여 무능한 존재로 낙인찍고 보호를 명목으로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장애여성은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타인의 부당한 요구나 통제에도 저항하기보다는 순응적 태도를 보이기 쉽다. 더욱이 평소 자신의 저항이 더 큰 강제력으로 제압당한 경험이 있던 장애여성이라면, 자신이 저항해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는 저항하면 더 큰 폭력을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해자들이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라고 규정된’ 장애여성의 저항 따위는 쉽게 무시하거나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장애여성이 비장애 성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사실이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회적 지원제도나 서비스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지원이 필요한 장애여성 개인의 무능함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되며, 도리어 불평등한 사회조건과 낮은 인권의식의 문제를 사회와 시민 모두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안전을 이유로 보호라는 명목의 통제에 익숙한 장애여성들은 약간의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쉽게 위축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실제 ‘얼굴이 무서워서’, ‘때릴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고 하는 경우도 가해자가 실제로 엄청나게 흉악한 모습이거나 가해자로부터 폭행을 경험했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위축되어 가해자의 모든 행동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저항해도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이 어떻게 하더라도 가해자가 그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저항을 포기하는 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가 저항하기를 포기하거나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동의’한 성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가?

성폭력, 저항하지 않으면 동의?

위의 사례들에서 공통된 점은 가해자의 강제력이나 피해자의 저항이 외형적으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마치 ‘합의된’ 성관계로 보인다는 것인데 이 관계는 정말 상호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성폭력을 ’상대방의 자발적인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물리적·사회적·경제적 힘의 차이를 이용하여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성적인 언어나 행동을 일방적으로 표출하여, 상대방의 성적자기결정권을 포함한 인권을 침해하고 상대방에게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앞의 사례들은 모두 성폭력이다. 여기서 핵심은 ‘힘의 차이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자발적인 동의 없이 그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것이다. 즉, 성폭력의 본질은 피·가해자 개인 간의 성애적 문제가 아닌 불평등한 사회적 조건에 따른 힘(권력)의 차이를 이용한 인권 침해이며 사회적 폭력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에 근거해 범죄 행위 수단인 ‘폭행 또는 협박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판단의 근거로 한다면 성폭력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혹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장애인에 대한 특례조항’으로 판단하더라도, 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해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곤란’할 정도로 장애가 중하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장애가 있음을 알고 이를 ‘이용’하였음이 입증되어야 처벌 가능하다. ‘장애로 인해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곤란할 정도’라는 기준은 매우 모호하여 해석하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특히 장애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는 사법기관에서는 피해자가 단지 일상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혹은 스마트폰을 잘 다룬다는 이유 등으로 장애가 중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저항’ 할 수 있었고, 그런데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성관계에 ‘동의’한 것이라 판결하기도 한다. 또는, 피해자가 장애인인 줄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장애를 이용한 것을 부정하는 가해자도 많다. 이런 경우 비장애인에게라면 하지 않았을 가해자의 언행을 근거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장애를 인지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해자의 장애인지 정도가 어떠했는지, 혹은 장애를 이용하려는 의도성이 있었는지를 명확히 증명하기는 어렵고 이런 점은 불기소나 무죄 판단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는 애초에 ‘진짜’ 성폭력 피해자라면 강력히 ‘저항해야 한다’는 왜곡된 통념에서 기인한다. 이에 따라 피해자의 저항 가능성, 저항 강도를 비롯해 가해자가 피해자의 저항을 제압하는 강제력을 사용했는지 등이 성폭력의 판단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법률적 조건들은 앞서 얘기한 성폭력의 본질이나 개념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따라서 현행법상으로는 가해자가 유·무형의 힘의 차이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피해자에게 가하는 성폭력에 대해 정당한 법적 처벌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성관계를 하려면 공증이라도 받아야 하냐고?

사실 가해자의 일방적인 성적 요구 자체가 문제인데 도리어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 혹은 저항할 수 있었는지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는 논리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 애초에 성폭력은 성적인 요구를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가능한 힘(권력)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가 가해자의 행위를 중단 혹은 지속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그렇다면 성폭력에 대한 법적인 개념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고민 속에서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 범죄를 구성하는 주요한 행위 수단인 ‘폭행 또는 협박’이 가지는 모순과 한계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하며, 대안으로 ‘피해자의 동의 여부’가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19년부터는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라는 이름으로 반성폭력 운동 단체들과 몇몇 뜻을 같이하는 법률 전문가들이 함께 강간죄의 범죄 구성요건을 ‘동의’ 개념으로 바꾸기 위해 대시민 홍보 활동과 입법 활동을 활발히 진행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내용이 일부 반영된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기도 하였고, 적어도 성폭력을 폭행이나 협박의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부분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시민들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그럼 성관계를 하려면 공증을 받아야 하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동안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상대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고 그에 기반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권력이 있을 때 ‘타인의 성적 권리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을 자신의 특권으로 인식하여 오히려 ‘자신이 누려야 할 특권이 빼앗긴다’는 생각에서 나온 저항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는 그들도 달라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는 행동을 하기 전에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그것이 싫으면 그 행동을 안 하면 된다.

성적 자기결정권, 부동의가 존중받을 권리

타인과 성적 관계를 맺기 원할 때, 성적권리의 주체로서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행동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왜냐면 상대도 나와 같은 동등한 성적권리를 가진 인권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성적 존재로서 동등한 인권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존재는 그 주체성이 부정되거나 통제되며, 혹은 유예되기도 한다. 성적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신체장애인, 성적 욕망을 조절할 수 없다고 낙인찍힌 발달장애인의 성적권리는 쉽게 부정되거나 통제된다. 또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성적권리는 인권이다’라는 당연한 말조차 주장하기 어렵다. 실제로 「군형법」은 동성 간 성적 행위를 하는 자체를 범죄로 처벌하고 있으며, 이때 행위 주체 간 합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더불어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인권의 주체로서 자신의 몸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부정되거나 유예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거나 성적 실천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으로부터 불쾌감, 조롱, 비난, 심지어 처벌을 받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비장애 성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정상성에 기반하여 수많은 존재를 비정상적이거나 무능한, 혹은 미숙하다는 이유로 성적으로는 대상화하면서도 주체로는 인정하지 않기도 하다.

성적 존재인 우리 모두는 자신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성적 안전과 건강, 교육과 정보제공 등을 위해 적절한 제도나 사회 서비스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상대가 있는 성적 행위에 있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일방적 강요나 결정이 아니라 성적 행위를 하고자 하는 서로를 동등한 성적권리의 주체로서 존중하면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인권으로서 성적권리의 주체임을 부정당하는 존재들에게도 성적 행위에 대한 동의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질까? 혹은 그들의 부동의 의사가 상대방에게 존중되고 수용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동의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의 핵심은, 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확인된 상대의 부동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따라서 모두가 동등한 인권의 주체이자 동료 시민으로서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적권리의 주체에서 배제된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차별적 구조에 대해 직시하고 이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른 동의 혹은 부동의 의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침해되고 있는지 질문하고 변화를 위한 대안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반성폭력 운동에서 성폭력 범죄의 구성요건으로 ‘동의’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는 성적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의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도리어 동의 여부를 질문받지 않는 존재들과 부동의 의사가 무시되기 쉬운 존재들이 무력한 피해자로만 호명되지 않도록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이는 성폭력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서 장애, 나이, 성별, 성정체성, 경제력, 사회적 지위, 혹은 출신 국가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들이 교차적으로 작동하면서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힘(권력)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시스템과 성차별문화에 도전하고, 동의 여부를 질문받지 않는 존재들이 연대함으로써 변화를 추동하고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자신을 명명하는 투쟁의 과정이 된다.

「군형법」은 군인 또는 준군인이 다른 군인 또는 준군인을 대상으로 강간, 강제추행 등 성폭력을 하는 경우 「형법」상 강간죄, 강제추행죄 등보다 가중처벌하는데, 현행 「군형법」 제92조의6은 동성 간 성관계를 ‘추행’, 즉 추한 행위로 규정하고 당사자 간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처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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