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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장애인 권리중심형 일자리,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노동

[기획연재] 장애인, 노동을 묻다 ①
디지털 뉴딜 시대, 새로운 노동 개념을 위하여

 

서로 다른 혁신의 광경

 

혁신의 시대라고들 한다. 플랫폼 자본, 디지털 경제, 긱노동 등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용어들이 이제는 어느덧 경제기사지면을 넘어 일상을 잠식해 가고 있다. 특히 코로나 사태에 따른 비대면 노동 및 서비스의 확대는 이 혁신을 더 가속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7월 발표된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 역시 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적극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이 발표에서는 디지털뉴딜, 데이터댐, 스마트의료 등 참신한 용어들이 꽤 등장했지만, 사실 이 용어들은 몇 년 전부터 급속도로 실현되고 있는 자본 주도의 정보화, 자동화의 내용들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뉴딜 펀드 등의 문제로 벌써부터 삐걱대고 있긴 하지만) 만약 이 계획이 이대로 차질 없이 진행된다면, 한국판 뉴딜의 한 축으로 언급된 ‘그린 뉴딜’, 그리고 현 정권의 핵심 기조로 언급된 ‘포용 국가’의 비전 역시도 대자본 내지는 잘 나가는 스타트업 기업의 경쟁력 확보에 의존해 실현될 것이다. 미래의 모든 운명은 오로지 혁신 자본에 의한, 혁신 자본을 위한, 혁신 자본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2020년 8월 7일 노들장애인야학 개교기념식에서 서울시 권리중심형 공공일자리 노동자인 ‘노들테크노전사’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정택용

지난 8월 7일,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이와 전혀 차원이 다른 혁신‘적’(?) 광경이 펼쳐졌다. 분홍조끼를 입은 중증장애인들이 돌연 대거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한동안 마이크를 제 몸 가까이 두려고 서로 크고 작은 분투를 벌인다. 몇 분 후 상황이 정리되자 뽕짝과 테크노가 조합된 멜로디가 울려 퍼졌고, 곧 이 멜로디는 무대에 오른 이들의 아우성과 마구 뒤섞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음정과 박자가 엇나갔고, 고작 20분 남짓한 상연 와중에도 이런저런 사고가 어김없이 터졌지만, 이 공연은 원래 그렇게 계획된 것 마냥 그저 자연스러웠다.

 

세 곡 남짓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이들은 자신의 상연 행위가 노동이라 선언했다. 통념적인 노동 개념에 비추어 본다면, 이 선언은 참 기이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노동은 전혀 ‘생산성’이 없는 데다가 이 활동의 주체들에게서 최소한의 ‘전문성’을 발견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얼마 전부터 이 선언은 더 이상 틀린 말만은 아니게 되었다. 서울시는 장애인운동 진영의 끈질긴 요구에 올해부터 시범사업으로 권리중심형 일자리를 260개 만들었고, 지금껏 노동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던 탈시설 최중증장애인들을 우선 고용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날, 마로니에 공원 무대에 오른 장애인들은 7월 1일부로 엄연히 이 일자리에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다.

 

혹자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일 못 하는’ 이 노동자들은 향후 권익옹호, 문화예술, 장애 인식 개선 활동 등을 통하여 「유엔(UN)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을 홍보하고, 또 때로는 국가 기관과 자본의 장애인 권리침해에 대한 항의에 나서게 될 것이다. ‘기생적 소비계층’으로 취급받아 온 이들, 기껏해야 ‘있으나 마나 한’ 시혜성 일자리에 배정되어 간신히 경제활동에 참여해 온 이들이 이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창조할 기회를 권리로써 획득했다.

 

기술 혁신,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

 

물론 이 노동은 디지털 뉴딜에 비하면 너무도 작고 초라하여, 여기에 혁신이란 용어를 갖다 붙이는 것 자체에 의구심을 품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리중심형 노동은 디지털 뉴딜보다도 훨씬 더 혁신적이다. 적어도 이보다 더 혁신적인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으킬 가능성을 가득 품고 있다. 디지털 뉴딜은 ‘생산성의 획기적인 향상’이라는 오래된 자본주의의 기조를 굳건히 유지하지만, 권리중심형 노동은 기존 노동의 문법을 묘하게 비껴가면서 의도치 않게 기존 생산 양식의 정당성 자체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왜 자본 논리에 의해 배제되어 온 이들이 여전히 그 논리를 유지하는 혁신의 시대 기준에 순응해야 하느냐고. ‘소수자들의 권리’와 ‘공공성’이라는 ‘생산물’을 창조하는 활동은 왜 세계를 창조하는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없냐고. 우리가 생산해온 ‘사회적 가치’는 도대체 왜 ‘가치’가 아니냐고.

 

그간의 자본주의 기술 혁신의 역사는 장애인 삶의 역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표준적 인구상’에 대한 끊임없는 갱신의 과정, 그러므로 곧 비정상적 인구의 배제 과정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초기 생산의 혁신과 함께 봉건 공동체들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이들은 공장제 생산에 적합한 ‘시계적 시간’과 도시의 공간성에 적응할 수 있는 노동 규율을 습득해야 했다. 20세기 중반 포드주의 생산 시스템에서도 누군가가 노동력 상품으로 판매되기 위해서는 잘게 쪼개진 분업 체계와 노동력의 과학적 관리에 적합한 ‘건강한’ 인구가 되어야 했다. 한편 과거의 이 혁신적 공정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노동 시장에서 배제됨과 동시에 사회로부터도 배제되었다. 애초 ‘노동할 수 없는(disabled)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장애인’이란 용어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고 고착화 되었다.

6월 26일 서울시 권리중심형 공공일자리에서 노동하기를 원하는 중증장애인들이 면접을 보고 있다. 사진 김필순

물론 디지털 혁신을 주도하는 자본들은 지금의 변화가 기존과 완전히 다를 것임을 확신한다. 이들은 직장의 노동규율에서 벗어난 자율적 인간들 간의 공유경제라는 비전과 함께, 노동·여가의 경계가 무너진 탈-노동 시대의 도래를 예언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제는 노동력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활용한 빅데이터 수집 및 활용 기술이 가치 생산의 핵심이 될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혁신 자본들은 개인들이 과거 산업에나 적합한 평준화 된 노동력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각자의 개성이 잘 실현될 수 있도록 인간 활동 양식 전반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장애인들은 이 기조 속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지금껏 노동할 수 없다고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왔는데, 지금의 혁신은 탈-노동의 비전과 함께 임금 노동 외 활동 전반에도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상 이 혁신은 현 자본의 운영 시스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력을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자본들은 디지털 기술 기반 착취 구조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표준화’된 인구상을 꾸준히 마련해 가고 있다. 이 기조에 따르면 이 시대 표준화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경쟁력을 확보해 갈 수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기술 활용 능력을 삶 내내 ‘스스로’ 습득해야 하며,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콘텐츠를 ‘스스로’ 개발하거나, 적어도 자신이 제공한 서비스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떠맡을 수 있어야 한다. 규정된 노동 시간 외에 이루어지는 활동들 전반을 상품화할 수 있는 삶만이 경쟁력을 갖는다. 그리고 플랫폼 자본은 이 미래 인간상의 제시와 함께 노동자들의 숙련도 향상과 직업교육 등의 책임으로부터 상당 부분 벗어났다. 플랫폼 노동자들 상당수는 사실상 과거와 동일한 노동을 수행하며, 자본의 첨단 감시망 안에서 이전보다도 더 과학적으로 관리되고, 또 여전히 엄격한 규율을 부과받고 있지만, 피고용인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능력을 활용하여 소득을 창출하는 ‘1인 자본’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이 혁신의 시대에 이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자연스레 시장 바깥으로 내몰릴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중증장애인 대다수는 최소한의 디지털 기술 활용 능력 습득은 고사하고, ‘1인 자본’으로서 갖추어야만 하는 이 시대 표준화된 인간상으로 거듭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여태 ‘비경제활동인구’로서 안정적인 자립 상황을 거의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중증장애인들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1인 자본’에 적합하지도 않을뿐더러, ‘한국판 뉴딜’의 새 시대 인재상 양성에 대한 국가의 대규모 투자 약속에도 불구하고, 향후 그러한 인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 받기도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 난관을 극복(?)하더라도, 그는 이 사회의 편견 탓에 ‘정상화된 신체’를 갖춘 이들보다 낮은 평가에 시달릴, 그러므로 곧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질 위협에 언제나 처해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플랫폼 노동에 뛰어든 경증장애인들조차 비정상적 신체를 갖추었다는 이유만으로 소비자들에게 낮은 별점을 부과받고선 시장에서 자연스레 도태되는 경우도 종종 보고되고 있으니 말이다.

기존의 노동 개념을 깨뜨리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 시대에도 장애인은 여전히 ‘표준 인구’ 바깥에 놓인다. 그리고 이 혁신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장애인은 여전히 그들을 지칭하던 용어의 전통적 의미 그대로 ‘불능한(disabled) 존재’로 남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유능한 자와 불능한 자 간의 간극은 첨단의 시대가 도래할수록 더 넓어질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이 혁신을 중증장애인들이 낙관적으로 두고 봐서는 안 되는 이유도, 오히려 자신들이 주도하여 생산 시스템의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혁신적 전환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이 아니라, ‘우리’에 의한 혁신을 준비하며

 

그럼 중증장애인들은 어디에서 미래 노동의 비전을 찾아야 할까? ‘탈-노동’과 기술혁신조차 중증장애인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면, 혹자들이 주장하듯 기존 장애인 고용 문제를 보완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는가?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은 중증장애인 고용 문제의 유일한 대안인 양 언급되곤 하는 보호고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상적인 작업 조건에서 일하기 어려운 장애인을 위하여 특정한 근로 환경을 제공하고 그 근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호고용을 실시하여야 한다.”(제14조) 이는 기존 보호고용되어 온 이들이 정상적 노동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심지어 이러한 환경에서의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훈련’으로 여겨지기에 이들은 ‘온전한 노동자성’을 인정받기도 힘들다.

 

따라서 기존 장애인 고용 제도 상당수는 ‘재활’의 취지에 맞게 장애인들이 일반 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을 우선적 목표로 해왔다. “장애인은 직업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스스로 능력 개발, 향상을 도모하여 유능한 직업인으로 자립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6조 1항)는 문구처럼, 장애인들은 당대 노동규율을 체득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마저도 중증장애인들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 이들에게 부과된 일자리들을 한낱 ‘시혜성 일자리’ 쯤으로 취급하고 있는 게 지금의 실정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직업재활 시스템은 이 디지털 뉴딜 시대에 부합하는 노동력의 양성을, 즉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표준화된 인구의 생산을 보장할 수 있는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전국 확대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14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사진 강혜민

권리중심형 노동이 혁신적인 것은 바로 장애인 고용에 대한 이러한 기존의 시각을 전복한다는 데 있다. 이 일자리는 자본 논리가 인구에게 항상 요구해온 표준화, 정상화에 정면으로 반발한다. 자신이 이 시대 생산 시스템에 부합하는 노동력 상품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통념 자체를 거부하면서 말이다. 오히려 이 노동은 생산적 신체로 거듭날 수도, 실은 자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그러할 필요도 없는 중증장애인들의 존재를 이 사회가 그 자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 노동은 불능한 것으로 규정된 장애인 개개인의 존재가 아니라, 그러한 존재를 양산하고 외따로 격리하는 이 세상이, 즉 장애인을 둘러싼 현재의 사회적 관계망이 전면적으로 바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의 기준에서는 ‘가장 일 못 하는 존재’인 이들이 조건만 달리 구성된다면, 정작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생산할 수 있음을 자신하면서.

 

물론 자본은 이들의 노동이 무엇을 생산하건 그 노동을 좀처럼 ‘생산적’이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인 정치경제학의 범주에서는 노동자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동을 넘어 자본이 다시 생산과정에 투여하여 자신을 증식해 갈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노동만을 ‘생산적 노동’이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리중심형 노동은 전통적으로 ‘비생산적 노동’에 포함되어 왔지만 생산적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투여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그 공적 의미를 인정받아 온, 그리고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그것이 갖는 의미가 재조명 받고 있는 불인정노동들, 예컨대 가사노동, 돌봄노동 등보다도 훨씬 덜 유용하지 않은가.

 

그러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조차, 이 세계는 자본의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는 것들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이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 역시 상품 생산 혹은 노동력 재생산 노동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자본 입장에서 주어진 ‘생산성’의 기준에 맞춰 생산되는 상품만을 ‘노동생산물’로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오직 자본주의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환상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오늘날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단순히 ‘비생산적’ 활동으로 치부되어 버리곤 하는 ‘불인정 노동’의 산물이 아니던가? 나아가 자본주의 시대 사회 변혁 운동들은, 누군가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들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하여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어온 활동들은 왜 이 세계를 구성해 온 생산 활동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비준했지만 사실상 거의 준수하지 않고 있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들을 이 세계에서 현실화하는 것, 그것을 ‘그간의 책임을 방기해온’ 국가 대신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이 이 사회에서 일상화해 가는 것 역시 충분히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권리중심형 일자리는 이제 막 시작 단계다. 이 일자리는 향후 더 확대될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그 방향과 구체적 내용이 온전히 채워지지는 않았다. 서울시가 결국 기존 생산성 평가 기준에 따라 이 일자리의 성과 지표를 단순화된 양적 수치로 환원하진 않을지, 이 일자리가 그 본 취지를 상실한 채 다른 복지 일자리마냥 ‘있으나 마나 한’ 일자리로 전락하진 않을지 등 많은 과제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다. 다만 나는 이 일자리가 자본에 의한 생산성의 혁신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혁신의 실험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본다. 이 일자리의 노동자들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이 시대와 불화하는 역량을 발전시킬 것이다. 장애인 노동권 문제를 넘어 ‘자본에 의한 탈-노동 담론’에 맞서 이 시대 노동 양식이 어떠한 형태로 변해가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물어 나가는데, 이 실험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껏 우리는 자본의 혁신에 맞춰, 스스로를 착취당할 수 있는 존재로 표준화하려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착취 없는 세계를, 자유로운 노동 양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전 세계의 불구들이여. 노동자들이여. 불인정 노동자들이여. 정상화를 거부하라. 잃을 것은 자본에 의한 당신의 규격화요, 얻을 것은 당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긍정하는 새로운 세계다.


* 이 글은 서울노동권익센터 노동커뮤니티 지원 사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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