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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탄 장애여성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동화를 꿈꾸며

[마이너의 서재]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어맨다 레덕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의 한 장면. 마녀 우르술라가 손가락으로 인어공주 에리얼의 턱을 들고 겁주고 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어릴 적 봤던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 속 에리얼은 지금도 선명히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뇌리에 박혀있다. 붉은색 긴 머리, 새햐얀 피부, 초록색 조개껍데기로 가린 가슴, 날씬한 허리. 그에 반해 마녀 우르술라는 보라색 피부에 뚱뚱한 몸매를 가졌으며, 착한 에리얼의 목소리를 빼앗는 나쁜 등장인물로 기억한다. 마녀로부터의 역경을 극복한 에리얼은 목소리를 되찾고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이 되어 ‘언어·지체장애가 사라진 채’ 왕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재작년 즈음,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의 실사판 제작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인공 에리얼 역을 흑인 여성 배우가 맡게 되자 캐스팅 논란이 일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는 ‘어떻게 동심을 파괴할 수 있느냐’, ‘미인이 아니다’, ‘원작을 훼손했다’라는 등의 몹시 부정적인 반응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원작을 따지고 보면,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는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제작되었으며, 안데르센이 쓴 원작 동화는 무려 180여 년 전에 세상에 나왔다. 그 긴 세월 동안 동화가 재연되는 사이,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겠다는 이유로 작품들은 원작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2021년, 여전히 우리의 상상 속 인어공주는 새하얀 피부에 목소리와 두 다리를 가지게 된 비장애인 백인여성이어야 한다. 꼬리를 유지한 채 전동휠체어를 탄, 그리고 언어장애가 있는 흑인여성 에리얼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의 저자 어맨다 레덕은 뇌성마비 장애여성으로, 어릴 적 안쪽으로 굽은 오른발을 수술했으며, 물리치료를 통해 절뚝거리며 걷게 됐다. 레덕은 성장기에 디즈니 만화영화 ‘인어공주’를 가장 좋아했다. 밤마다 바다 밑에서 헤엄치는 꿈을 꿀 정도로 인어공주에 푹 빠져있었지만, 그가 당시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때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은 나는 이미 인어였다는 사실이다. 걸을 수 있는 다리를 갖고 싶다는 에리얼의 소망은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던 내가 간절하게 꾸던 꿈 아니었나? (…) 에리얼과 달리 나는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다리는 얻지 못했다. 나로서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소망했지만, 수술과 치료의 힘으로 맞이한, 신체와 관련한 행복한 결말은 결국 내가 화면에서 본 이야기 속 행복한 결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어맨다 레덕 지음, 김소정 옮김, 을유문화사, 2021

행복한 결말에는 늘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몸을 갖는 과정이 담겨있다. 레덕이 이 책에서 동화를 통해 설명하는 장애 개념은 사회적 모델을 기반으로 확장한다. 레덕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정상성, 지능, 우수성에 관한 생각을 바탕으로 가치를 매기는 체제로서 비장애중심주의(ableism)를 설명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뿐만 아니라 인종, 젠더, 외모 등에 있어 우수함과 생산성을 지향하는 내용들을 포괄할 수 있다.

남북조시대의 중국을 배경으로 아시아여성이 주인공인 디즈니 만화영화 ‘뮬란’에도 비장애중심주의적 서사는 존재한다. 주인공 뮬란은 여성인 자신의 신체를 열등하다고 인지하며, 군대에 함께 입대한 남자들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 입증해 보인다. 이를 통해 뮬란은 비로소 사회에서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존재로 평가받고 자신을 만족해한다. 

동화 속에서 장애는 늘 몸이 비틀려있거나, 반인반수거나, 키가 작거나, 괴물의 모습을 한 인간도 아닌 ‘무엇’으로 묘사된다. 특히 그림형제의 동화에서 장애는 주인공의 극복 서사에 힘을 싣는다. 레덕은 그림형제의 동화에 장애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장애는 동화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부여해 독자가 등장인물을 잊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라고 해석한다. 예를 들어, 무난하고 아름다운 몸은 쉽게 잊히지만, ‘고슴도치 한스’처럼 상체가 고슴도치인 남성이나, ‘손을 잃은 아가씨’에서 두 손이 잘리게 된 여성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두 주인공들은 고슴도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손이 자라게 되면서 장애를 극복하는 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 결국 개인은 사회가 원하는 몸으로 변화하게 되지만, 사회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고슴도치 한스 삽화 (1909). 고슴도치 한스가 나무 위에서 수닭을 타고 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면서 레덕은 장애남성과 장애여성이 가지는 서사가 다르게 묘사된 점도 짚어낸다. 칼뱅파 기독교도인 그림형제는 장애인 주인공들을 종교적인 성역할에 부합하게 그려냈다. ‘고슴도치 한스’는 남성으로서 자신의 장애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심지어는 가시를 이용해 자신을 싫어하는 공주의 옷을 벗겨 몸이 피로 덮일 때까지 찌르는 끔찍한 일도 저지른다. 반면에 ‘손을 잃은 아가씨’에서 주인공 여성은 영영 남성들에 의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은 악마의 명령을 받은 아버지로부터 두 손이 잘려 나간 뒤, 신이 다시 손을 자라게 해줄 것이라 믿으며 바깥 세상으로 떠난다. 그러나 왕실 정원에서 눈물을 흘리다 발각되어 지하 감옥에 갇히고, 그녀를 발견한 왕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감옥에서 꺼내준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어렸을 적 답습한 동화 속 이야기는 나뿐만 아니라 레덕을 비롯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성장 과정에서 가치관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동화에서 여전히 여성은 수동적이고, 장애인은 주인공이 될 수 없거나, 주인공이 되더라도 금세 장애를 극복해버린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동화 속 이야기는 아직도 비장애중심주의에 갇혀있다. 장애인의 삶은 동화 속에서도 상상할 수 없다. 

레덕은 “장애는 내가 물리쳐야 할 악당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라고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의 파트너가 생각났다. 나의 파트너는 중증 지체장애인으로, 한쪽 다리가 마비되어 목발을 짚고 다닌다. 그는 길에서 만나는 꼬마들로부터 반인반수인 ‘켄타우로스’ 혹은 ‘난쟁이’로 불린다면서, 키가 작고 척추가 휜 자신의 모습을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바로 이 동화 속 인물로 불리는 파트너와 결혼을 했다. 어떤 사람은 파트너에게 장애가 있어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 상상할 수 없었다며 신기해했다. 켄타우로스나 난쟁이가 주인공인 동화가 많았다면 그가 나와 파트너의 관계를 상상하기 더 쉬웠을까?

그동안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현되어야 하는 동화에서조차 장애는 주변화되고 결함으로 여겨져 이야기의 중심에 설 수 없었다. 문제는 이 ‘구린’ 상상력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진부한 비장애중심의 이야기를 멈추고, 장애를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는 휠체어를 탄 소녀가 주인공이 되어 자기 자신이 아닌, 세상을 바꿔나가는 동화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 이 서평은 정치발전소의 '마키아벨리의 편지' 4월호에 실렸습니다.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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